선원선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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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세 시조(始祖) 한(翰)

 

시조의 휘(諱)는 한(翰)이요, 호는 견성(甄城)이다. 신라의 사공(司空)벼슬을 지냈다.

배위(配位) 경주김씨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

 

공은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18세 때는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쳤다. 명성이 조정에까지 떨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지 1년 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온갖 벼슬아치들이 다 화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즐겼다. 그래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분이 바로 경주김씨 이다.<완산실록(完山實錄)에서>

 

 

 

제2세(世) 자연(自延)

 

시조 한(翰)공의 아들로서 이름은 자연(自延)인데 <경주이씨족보>에는 자연(子延)으로 표기되어 있다. 시중(侍中)을 지냈다. 배위는 진양군(晋陽君) 윤자인(尹自仁)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자연공이 신라 경순왕 때 시중을 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翰) 시조공이 신라 경덕왕(742∼764 在位) 때 살았는데, 경순왕(927∼935 在位) 때까지는 170여 년이나 간격이 생기니 30년이 1세대라는 통념으로 보아서는 너무나 떨어져 있다. 따라서 경순왕 때 살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자연공이 지냈다는 `시중(侍中)'이란 벼슬은 내각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그러나 배위인 윤씨의 아버지 윤자인의 봉군호(封君號)인 진양군(晋陽君)은 후대에 군호로 올려 기록한 것일 것이다.

 

 

 

제3세(世) 천상(天祥)

 

2세 자연공의 아들로 이름은 천상이요 벼슬은 복야(僕射)를 지냈다. 배위는 시랑(侍郞) 벼슬을 지낸 영일정씨 습명(襲明)의 딸이다. `복야'란 원래 중국의 당(唐) ·송(宋) 때 재상의 별칭인데, 고려 시대는 정2품으로 부총리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의 관직으로 지칭한 것이라 추측된다. 장인인 영일정씨의 관직 시랑(侍郞)은 신라 ·고려 때 관직으로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한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전한다.

천상공은 젊어서 매우 호탕하였는데, 늦게 이치를 궁구하는 일을 좋아해,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관서에 들어가 천문지리를 연구했다. 9년만에 천문지리에 달통하여서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지라, 고려로 돌아와서 완산부(完山府) 기린산(麒麟山) 왕자봉(王字峯) 밑에 산소 자리를 잡고서 “이곳에 산소를 쓰면 우리 후세 자손들 중에 반드시 왕이 나오리니 아무리 괴롭더라도 절대로 천장하지 말라”고 하였다.

 

 

 

제4세(世) 광희(光禧)

 

3세 천상공의 아들로 이름은 광희요 아간(阿干)을 지냈다. 배위는 대장군 황지선(黃志善)의 딸이다.

 

"아간"이란 벼슬은 "아척간(阿尺干)", `아찬'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17 등 관계의 제6위였다 한다. 광희(光禧)를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는 `광희(光喜)'로 쓰기도 한다.

 

태조고황제의 친구였던 이색(李穡 : 1328∼1396)이 지은 <환조대왕 정릉 신도비명(桓祖大王 定陵 神道碑銘)>에는 `전주리씨는 대성(大姓)으로 신라 아간 `광희'가 사도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고…'라고 하여 우리 시조를 `광희'로 보았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세직(世稷 : 世直)으로 시조를 삼아 중국 당나라 종실로 있다가 우리 나라로 건너와 전주에 세거하며 우리의 시조가 된 양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것이 세대로는 이 `광희'공에 해당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세직공은 훌륭한 인물로 문장과 도덕이 뛰어난 당대의 은둔 군자인데 아들 8명을 두었다. 공은 이 아들들에게 형제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며 참언과 재물을 멀리하라고 경계하였다. 그러나 아들 8형제 중에 한 명만이 대를 잇고 나머지는 전염병에 모두 죽는 대목이 곁들어져 있다.

 

 

 

제5세(世) 입전(立全)

 

4세 광희공의 아들로 이름은 입전이요, 벼슬은 사도(司徒)를 지냈다.

배위는 한림(翰林) 백광선(白光善)의 딸이다.

 

<씨족원류>에는 입전공의 벼슬이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요, 이 입전공부터 고려의 벼슬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사도'란 고려 때 삼공(三公 : 司馬 ·司徒 ·司空)의 하나로 정1품이었으며, 삼사(三師)와 더불어 임금의 고문이었다. 원래는 `삼중대광' 혹은 `벽상삼한(壁上三韓)'이란 품계가 있었는데 `사도'가 높은 벼슬이기 때문에 앞에 이런 품계명을 덧붙여 `삼중대광사도'라고 부른 듯하다.

 

`한림'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준말로 고려 때 한림원(翰林院)에 소속된 정4품의 관직이었다.

 

<동국세기>에는 입전공이 문옹(文雍)으로 표기되어 나오는데, 8형제 중 막내로서 위로 7형이 모두 전염병으로 일시에 사망하여 합동 장례를 치르고 유리걸식하니, 임금님이 그 소식을 듣고 고결함에 탄복하여 고관의 직책까지 주었다는 내용이 곁들어져 있다.

 

또 <충효전>에도 이 이야기와 대동소이하나 입전공이 문옹(文翁) 으로 기록되고 8형제 중 장형으로 되어 있다.

 

 

 

제6세(世) 긍휴(兢休)

 

5세 입전공의 아들로 이름은 긍휴요,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배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고려 시대의 `사공'은 삼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이었는데,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또 `정언'은 고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郞舍) 벼슬로 종6품이었다.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일을 맡았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일화가 곁들여 있다.

`긍휴공은 중국에 건너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천태수(醴川太守)가 되었다가, 7년 후에 우리 나라로 돌아와 몇 해 동안 계시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관사재(觀史齋)에 계시다가 객사하셨다.

 

이에 부인 이씨가 7세가 된 아들 염순(廉順)을 데리고 중국 조정에 밤낮으로 호곡하며 호소했다. 이 때 완탑촌(完塔村)에서 자는데 밤에 꿈 속에 육금불(六金佛)이 와서 하는 말이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밑에 버려져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의 힘으로 시체를 찾고, 또 천자의 명으로 우리 나라로 모셔와 선영에 장례 지냈다.'

 

그리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적혀 있다. 이 두 책에는 긍휴공이 도민(道敏)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긍휴공은 호탕하고 방랑벽이 있어 중국에 건너가 삼성문(三省門 : 三聖門)에서 수업(受業)하여 천문지리에 달통하고 9년(또는 8년)만에 귀국하여 시조의 묘를 향린산(香麟山 : 香因山)으로 이장하고 훗날을 기약한다고 했다 하였다.

 

 

 

제7세(世) 염순(廉順)

 

6세 긍휴공의 아들로 이름은 염순이며, 벼슬은 생원(生員), 호장(戶長)을 지냈다. 배위는 첨대정승(僉隊政丞) 정익조(鄭翼祚)의 딸이다.

 

`생원'은 옛날 소과(小科) 종장(終場)에서 경서(經書)의 뜻을 묻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호장'은 조선 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육방(六房) 중의 하나로 낮은 벼슬이었으나, 고려 시대에는 향리(鄕吏)의 으뜸 구실로 당대등(堂大等)이라고도 했는데, 요사이의 지방 자치 단체의 장쯤에 해당하였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다음과 같은 긴 이야기가 전한다. 이 두 책에서는 염순공이 철중(鐵中 : 哲重)으로 나온다.

 

`그는 7형제 중 맏형(또는 중간)이었는데, 나머지 6형제는 모두 농아였고, 혼자만 준수하고 문장에 능하여, 26세(또는 28세) 때 문명(文名)을 날려 중국으로 들어가 송나라 휘종(徽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귀국하니, 고려조에서 기특하게 여겨 예천태수(醴泉太守)에 임명했다.

 

그 뒤 그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천자의 눈에 들어, 마침 쳐들어온 금(金)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대도독부원수(大都督副元帥)로 임명되어 4만여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의 부인 오씨(吳氏)가 7세 된 아들 화선(和善 : 華先)을 업고 9개월을 걸어 중국에 들어가 완탑촌(玩榻村 : 完塔村)에서 묵을 때였다. 이 날 밤 꿈에 팔척대인(八尺大人 : 六丈鐵人)이 나타나 말하기를“당신 남편의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 <충효전>에는 蜀山으로 적혀 있음) 아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오씨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자살하려 하니 먼저 노인이 또 꿈에 나타나“죽지 말라. 훗날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여 깨닫고, 이튿날 문 밖을 나갔다.

 

그 때 한 여인이 슬피 울며 오는데, 거마(車馬)와 좌우에서 모시는 시녀들이 굉장하였다. 오씨가 나아가 물으니 답하되 “나는 운남국(雲南國 : 漢南國) 우도독(禹都督)의 딸인데, 남편 곽필성(쥦必誠 : 郭必成)이 도원수의 종사관(從事官)이었는데, 항주 대전에서 전사하여 그 시체를 찾으러 가는 길입니다” 하였다.

 

오씨도 그간의 일을 말하니, 그 우씨가 수레에서 내려 오씨의 손을 잡고,“나라는 비록 다르지만 인심은 같으니 어찌 차마 모른 체 하겠소?” 하고 함께 수레에 태워 항주로 갔다.

 

그러나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울부짖으며 낮에는 찾아 다니고 밤에는 복파장군(伏派將軍) 사당에서 잤다. 몇 개월이 되어도 찾지 못했는데, 하루는 한 노인이 지팡이를 들고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조선에서 온 부원수의 사령(使令)이었는데, 이 부원수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나는 다리에 살을 맞아 살아났으나 이렇게 불구가 되었습니다.”라고 하고 부원수의 시체를가리켜 주었다.

 

그래서 시체를 모셔 올 때 중국에서 모든 절차와 비용을 제공하여 3개월만에 귀국하여 선산에 장례지내니 조상꾼이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이 일화는 <완산실록>에서는 6세 긍휴공 사적에 비슷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 세 책이 거의 허구적인 사실을 기록한 소설적인 사료임을 짐작케 한다.

 

 

 

제8세(世) 승삭(承朔)

 

7세 염순공의 아들로 벼슬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생원 호장이었다. 배위는 시랑(侍郞) 백광현(白光賢)의 딸이다.

 

`시랑'은 고려 때 육부(六部) 또는 육조(六曹)의 버금 벼슬로 조선조 때 참판(參判) 곧 요사이의 차관에 해당된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승삭공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사람들이 동방의 효자라 칭했다. 나이 67세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향린산(香麟山)에 올라가 산맥을 보고 돌아오다가 청평산 (靑平山) 아래에 이르러 객사하였다. 왕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호상(護喪)케 하고, 시호를 문효(文孝)라고 내렸으며, 서원에다 모시게 했는데 고려 말에 이르러 없어졌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데, 승삭이 화선(和善 : 和先)으로, 60세에 등과하여 65세에 벼슬이 평의사(平義使 : 平義士)에까지 이르렀는데, 갑자기 작고하여 국왕이 예관을 파견하여 호상하고, 평장사(平章使 : 平章事)로 증직하고 시호를 문학(文學) 이라 하고, 향린산 아래에다 서원을 짓고 모셨는데, 공근왕(恭勤王 : <충효전>에는 恭讓王) 때 소인배들이참소하여 서원을 헐어 버렸다고 한다.

 

 

 

제9세(世) 충경(充慶)

 

8세 승삭공의 아들로 이름은 충경인데, <씨족원류>에는 광경(光慶) 혹은 극경(克慶)으로 적기도 한다고 했고, <목은집(牧隱集)>에도 충경(充慶)으로 씌어 있다 한다. 벼슬은 생원이다. 배위는 생원 윤자필(尹自必)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충경공은 초년에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유리걸식의 지경이었는데, 지관(地官) 김지원(金志元)이라는 이가 와서 “선대 조상의 산소가 흉지에 잘못 모셔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오.” 하므로, 그와 함께 향린산으로 올라가 산맥을 살펴보았는데, 김지원이 말하기를 “7∼8대에 이르러는 멸망하고 말 땅이니, 마땅히 천장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렇다면 마땅한 땅이 어디에 있소?” 하니, 대답하되 “청령산(靑嶺山) 밑에 5대에 걸쳐 서 삼공(三公)이 날 땅이 있소.”라고 했다. 그래서 그곳으로 산소를 옮기려고 하는데, 이 날 밤 부인 윤씨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선조의 유골을 무슨 까닭으로 천장하려 하는가? 청령산 아래 5대에 삼공이 나올 땅은 곧 금가(琴哥)의 산소 자리이니, 금가 집에 리 씨가 들어가 어찌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로 미루어 보면 도리어 멸망할 땅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윤씨가 꿈의 조짐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말렸으나 듣지 않고 김지원과 더불어 향린산 밑에 갔는데, 뇌성이 떨치더니 김지원은 벼락을 맞아 즉사하고, 충경공은 바위 밑에 엎어졌다가 겨우 살아 돌아오셨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똑같은 설화가 적혀 있는데, 다만 충경공의 이름을 희흥(希興 : 喜興)으로, 김지원(金志元)을 김지원(金知元 : 金智原)으로, 배위 윤씨는 할머니 오씨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제10세(世) 경영(景英)

 

9세 충경공의 아들로 이름은 경영이다. 벼슬은 생원 호장이었다. 배위는 유수(留守) 윤필인(尹必仁)의 딸이다.

 

`유수'는 수도 이외의 인근 도시 또는 행궁(行宮)에 두던 특수한 지방장관이다. 고려 ·조선조에 걸쳐 두었는데 중앙 관서의 직속 기관이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경영공이 7세에 부모가 함께 돌아가시니 증조모 정씨(鄭氏)가 등에 업고 구걸하면서 키워 16세가 되어 유수 윤필인의 딸에게 장가가셨다. 윤씨 부인은 증조모 정씨를 섬길 때, 증조모 정씨가 나이가 많고 치아 마저 없자 윤씨는 자신의 젖을 짜서 지성으로 효도하여 천수를 마치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효성스런 손부라고 칭찬했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똑같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이러하다. 경영공의 이름이 `직(直)' 또는 `진(進)'으로 표기되고, 증조모가 오씨로, 강남의 큰 장사꾼 최원(崔元 : 崔遠)에게 발탁되어 16세에 요명궁(寥明宮 : 瑤明宮) 거사(居士) 홍무(洪武 : <충 효전>에는 洪務日)의 사위가 되었다. 부인 홍씨의 효행이 특이하여 97세 된 증조모 오씨가 치아가 없음을알고 자신의 젖으로 봉양하여 101세까지 사시게 하고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르는데 죽만 먹고 그 애통함이 예도를 넘었었다는 점이다.

 

 

 

제11세(世) 충민(忠敏)

 

10세 경영공의 아들로 이름은 충민이고 벼슬은 장사(長史)이었다. 배위는 대장군 최오헌(崔五憲)의 딸이다.

 

`장사'라는 벼슬은 고려 때 동궁관(東宮官)의 관직으로 품계는 종7품이었으며, 또 육위(六衛)에 속한 종6품의 장사도 있었다. 조선조 때도 이런 관직이 있었는데,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에 속해 있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덧붙여 있다.

`충민공은 처음에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의탁할 데가 없었는데, 하루는 별안간 청의동자 (靑衣童子)가 나타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어 천명을 알지 못하고 대개가 하늘과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그대는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들을 허물하지 않으면서 천명을 기다리니 어째서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답하시되, “궁하고 통달함이 모두 운명에 달려 있는 데, 어찌 감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망령되이 말하리오?”라고 하였다. 이에 청의동자가 기꺼이 사례하고 한 물건을 주면서 “천명이 돌아올 때 이것이 변하여 활과 화살이 되어 교룡(蛟龍)을 쏘게 될 것이오”라 하고 가거늘, 이에 보니 토기 모양은 아니고 술잔 모양 같았다.

 

그것을 숨겨 두고 청림산(靑林山) 아래에서 그릇을 굽는데, 불합격품이 나오지 않아 집 안 형편이 차차 나아져 말년에는 부자 소리를 들었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약간 다른 점은 이러 하다. 곧 `충민'공의 이름이 `후경(厚慶)'으로 나오고, 그는 9형제였는데 일시에 8형제가 전염병으로 죽고, 막내인 그가 외톨이가 되어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데 천동(天童)이 내려와 이상한 물건을 주며 말했다는 것이다.

 

 

 

제12세(世) 화(華)

 

11세 충민공의 아들로 이름은 화인데 추밀(樞密) 벼슬을 지내셨다. 배위는 대언(代言) 벼슬을 한 황진(黃璡)의 딸이다.

 

'추밀'은 고려 때 왕명의 출납(出納) ·숙위(宿衛) ·군기(軍機) 등을 맡아 다스리는 관서 추밀원(樞密院)에 딸린 관원으로 추밀원사(樞密院使)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가리킨다. 종2품 ·정3품 벼슬이었다. 그리고 `대언'은 왕명을 출납하는 벼슬로 승선(承宣)이라 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승지(承旨)가 되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화공은 처음에 집이 가난했으나 집안 일은 돌보지 아니하고 술집과 기생집에만 다니며 자칭 협객(俠客)이라고 했는데, 부인 황씨가 홀로 사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강도를 만났으나 끝까지 절개를 잘 지켰다. 청림태수(靑林太守)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포상하고 정려문을 내렸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비슷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다만 화(華) 공을 덕량(德亮) 또는 덕랑(德郞)으로 적고, 부인 황씨를 김씨로 대신했으며, 그 부인이 효성스럽고 용감하여 도적떼가 들어 재물을 강탈할 때 시어머니를 구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완산실록>의 내용을 부연하고 있다.

 

 

 

제13세(世) 진유(珍有)

 

12세 화공의 아들로 이름은 진유라 했는데 벼슬은 생원 호장을 지냈다. 그러나 <씨족원류>에는 일명 유진(有珍)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배위는 첨대중찬사(僉隊中贊事) 오대박(吳大朴)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기사가 더 들어 있다.

 

`진유공은 처음에 집안이 가난하였으되 지극한 효도로써 어머니를 받들더니, 부인 오씨가 시집와 아내의 도리를 극진히 하여, 가난하되 편안해하고 분수를 잘 지키며, 채소를 뜯어다 호구지책을 삼으면서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히 효도롭게 하니, 세상 사람들이 항상 효자 효부라고 칭하였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서는 진유공의 이름을 천균(千鈞) 또는 천준(天俊)으로 표기하고 어머니를 김씨로 표현한 외에는 대체로 <완산실록>과 같은 내용이다.

 

 

 

제14세(世) 궁진(宮進)

 

13세 진유공의 아들로 이름은 궁진인데 한림(翰林)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씨족원류>에는 호장을 지냈다고 하였다. 배위는 장군을 지낸 이요(李?)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더 들어 있다.

`궁진공이 15세에 아무개[失名]에게 나아가 배우는데, 그 선생이 낮에 꿈을 꾸었다. 꿈에 궁진공이 물고기를 잡아 양을 타고 올 때 달이 동산에서 뜨는데, 용이 머리를 북쪽으로 들고 꼬리를 낮게 하고 서고,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북 치고 구호 부르며 행진하는 꿈을 꾸었다.

 

그 선생이 그 꿈을 풀이해 보니 조월(早月 : 朝) 어양(魚羊 : 鮮)에 신령스러운 물체가 도와 응하는 격이라, 괴이히 여겨 감탄하다가 혼자 말하되, “별것 아닌 것 같으나 후일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으리라” 하고 스스로 물고기와 양 같은 물건을 준비해다가 두고 예로써 대접했다.

 

공의 나이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호류궁(琥琉宮) 교수관(敎授官)에 임명되었는데, 왕이 공의 모습을 보고 곧 한림원으로 옮겨 임명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남의 모함을 받아 귀양 갔다가 거기서 작고했다.'

 

그러나 <동국세기>와 <충효전>에서는 이 대목을 더 각색하여 미화시키고 있다.  곧, 궁진공의 이름은 여열(餘說)로 표기되어 나오는데, 여열이 15세 때 학문을 가르친 선생이 김대유(金大有)로 실명화(實名化)되고, 김대유가 꿈을 꾼 뒤 여열을 사위로 삼으며, 여열이 27세에 등과하여 홀유궁(笏留宮 : <충효전>에는 屹留宮으로 표기했음)의 교수관(敎授官)이 되니, 모든 선비들이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배륭대군(裴隆大君 : <충효전>에 는 濱龍大君으로 표기됨)이 여열의 기상과 문장을 보고 임금님께 추천하여 대제학(大提學)을 제수하려 했는데, 중상하는 자 있어 여열은 벼슬을 팽개치고 전원으로 돌아가 두문불출 하다가 작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은 두 아들을 두니 장남이 용부(勇夫)이고 차남이 단신(端信)이다. <씨족원류>에는 단신을 단인(端仁) ·서인(瑞仁)으로 기록되었는데 글자가 비슷하여 이런 표기가 생겼을 것 이다. 이 단신공이 문하시중(門下侍中) 벼슬을 지냈고 시중공파(侍中公派)의 시조가 되었다. `시중'은 요사이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제15세(世) 용부(勇夫)

 

14세 궁진공의 장남으로 이름은 용부요,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씨족원류>에는 대장군 겸 태자청도솔부솔(太子淸道率府率)을 지냈다고 하였다. 배위는 정승을 지낸 이형(李珩)의 딸이다.

 

`대장군'은 고려 무관의 벼슬로 상장군(上將軍) 다음, 장군(將軍)의 위로 종3품이었다. `태자청도솔부'는 태자좌청도솔부(太子左淸道率府)의 준말로 고려 때 동궁(東宮)의 시위(侍衛)를 맡은 관청이다. 그 관청의 장이 부수(府率)일 것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덧붙여져 있다.

 `용부공은 3세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만 계신데, 남의 모함을 받아 세살배기가 잘못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 때 16세 된 누님이 한 분 계셨고 공은 겨우 말을 익히는 때였다.

 

마침 금(金)나라의 난리를 만나 중국 송나라 정부에서 군사를 모집하는데, 그 누님이 어린 동생을 대신하여 징발되어 낙랑(樂浪) 지방에 이르니 원수 이민항(李敏恒)이 군사를 점검하였다. 그 누님 이씨가 허리에 화살통을 비껴 차고 손에 화살을 들고 나서니, 그 자색이 남다르고 위풍이 당당하여 이민항 원수가 보고서 “그대는 뉘 집 아들인고?” 하므로, 대답 하되 “나는 한림(翰林) 리궁진(李宮進)의아들 용부(勇夫)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으로 데려갔다. 원수 악비(岳飛) 장군이 우리 나라 장수와 대좌하여 군사를 점검할 때, 누님 이씨가 앞으로 나가 섰다. 악비 장군이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말하기를 “뉘 집 아가씨 인데 군대에 들어왔느냐? ”하므로 이씨는 시를 지어 악비 장군에게 말하니 내용은 이러하다.

 

(點額難逃老父名) 이마에 점 찍히니 늙은 아버지 이름 빼낼 수 없어

(充軍何惜細腰躬) 군대에 채워지니 가는 허리의 몸이라고 어찌 애석해하리?

(羅衣換着鐵衣冷) 비단옷 벗고 차디 찬 철갑 옷을 갈아 입으니

(塞外幸伸男子風) 국경지방에서 다행히 남자의 기풍을 펼 것이로세.

 

악비 장군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칭찬하고 이 시로 인해서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간신의 이간질로 악비 장군이 죽었다. 그래서 남편과 사별한 이씨는 머리를 깎고 영고탑(寧古塔)까지 떠돌아가 아들을 낳고 살았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거의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만 `용부'가 `충일(忠逸 : 忠溢)'로, `이민항(李敏恒)이 이민행(李敏行)'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두 책에서는 일화가 더 구체적이다. 악비가 진회(秦檜)에게 모함을 당하여 죽을 때 리씨의 손을 잡고 뱃속의 아이가 남아일 것이니 잘 키우면 7대 후에 친정 본종(本宗)의 자손들과 손잡아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리씨는 머리를 깎고 일부러 장애자로 만들어 구걸하며 방성지(方城池) 면수(沔水) 가에 사는 왜인(倭人) 집에 의지하여 살았다.

 

그러나 <충효전>은 더 구체적이다.

 

리씨가 악비를 사별하고 스스로 병자로 만들어 유리걸식하다가 방령지(方靈地)에 이르러 면수정장(綿水亭長) 갈가(乫家)에 의탁하니 이는 이적(夷狄)이었다. 그곳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의 7대손에 이르러 퉁두란( 李之蘭 : 靑海李氏 始祖)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이 용부 대장군의 아들이 둘이 있으니 장남은 인(璘)이요, 차남은 거(?)로 이분이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를 이루어 시중공파에 이어 두번째 지파가 갈라져 나갔다.

 

<선원계보>에는 `인'과 `거' 두 형제만 기록되어 있으나, <씨족원류>에는 용부 대장군은 3남 1녀를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16세(世) 인(璘)

 

15세 용부공의 아들로 이름은 璘(인)이고 내시집주(內侍 執奏)란 벼슬을 지냈다.

배위는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시중(侍中)을 지낸 문극겸(文克謙 : 1122∼1189)의 딸이다.

 

평장사공의 휘는 거, 자는 만상(晩祥), 호는 정암(靖菴)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시조 사공공(司空公)의 16세손으로 1174년(고려 명종 4)에 대장군 용부(勇夫)의 차남으로 전주 자만동에서 태어나, 1194년(고려 명종 24)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가군사(永嘉郡事)에 제 수되었다. 1198년(고려 신종 1)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고 1200년 문하시중 평장사 (門下侍中 平章事)를 거쳐 고려 희종 때 재상으로서 왕의 스승을 겸했다. 강종 때 재상으로 서 세자의 사부(師傅)를겸했고 1214년(고려 고종 1) 재상으로 왕의 스승을 겸했다. 배위는 고려 의종때 시중(侍中)을 지낸 남평문씨 극겸(克謙)이 딸이다.

 

평장사공파(거)와 선원선계16세 인(璘)의 장인은 한 분?

 

 

 

제17세(世) 양무(陽茂) [생몰 : ?∼1231]

 

16세 인공의 아들로 이름은 양무이며, 벼슬은 장군(將軍)을 지냈다.

배위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전주에 살다가 아들인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삼척 이주(三陟移住) 때 삼척 활기리(活耆里) 로 옮겨 왔고, 그곳에서 1231년(고려 고종 18) 별세하여 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동(蘆洞) 신좌을향(辛坐乙向) 준경묘(濬慶墓)에 모셔져 있다.

 

배위 이씨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東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 영경묘(永慶墓)에 모셔져 있다.

 

1899년(광무 3) 4월 16일 고종황제가 준경묘 ·영경묘라고 묘소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양쪽에 묘비와 음기(陰記)를 고종황제가 친히 지었다. 그 내용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개국 초에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고 금관(金冠)과 옥대(玉帶)를 삼척 원에게 하사하고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해마다 두 묘소를 보살피게 했으나 점점 폐허화 되어 선조 때 정철(鄭澈 : 1536∼1593)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 산소의 지도까지 그려 올려 수축하기를 요청한 일이 있다.

 

그 뒤 다시 수축하고 대대로 산소의 수호와 벌목의 금지 등 보호에 애써 왔다. 그러다가 1899년에 고종황제가 재상 리중하(李重夏)를 파견하여 묘소를 재정화하고 구역을 확정하고 비를 세우고 내력을 음기로 새기게 하였다.

 

이로 보면 1899년부터 준경묘 ·영경묘라 추존되고 대대적으로 수축해 오늘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준경묘와 관련 다음과 같은 "백우금관(白牛金棺) 설화가 전해진다.

 

활기리에서 앞재를 넘어 준경묘에 이르면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신좌을향으로 양무장군의 묘가 모셔져 있는데,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 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세를 보면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므로 전주리씨 후손은 장손들이 허약하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160여 년 전에 양무장군께서 이곳에서 돌아가시자, 목조대왕께서는 선친의 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나무하러 두타산으로 올라갔던 집의 일꾼이 나무를 하다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도승과 상좌승이 앉아 산맥을 보며, “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도승의 말을 듣고, 나무하다 말고 뛰어 내려와 주인인 목조대왕에게 알렸다.

 

목조대왕은 급히 달려가 도승 일행을 만나 백방으로 간청하니, 그 도승이 그 자리를 가리켜 주는데, 대신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다. 곧 개토제(開土祭) 때 소 1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관은 금관을 써야 효험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에 편법을 쓰기로 하였다. 마침 처가에 흰소가 한 마리 있어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체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 형편이 못 되니 황금 빛깔의 밀짚(일설에는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에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우금관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신하여 1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했다고 도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도합 5백년의 조선왕조의 수명이 되었다고도 한다. 하여간 이 준경묘 자리는 오늘날도 풍수를 따지는 사람은 우리 나라 제일의 명당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장군'이란 벼슬은 고려시대에는 무관의 정4품 벼슬로 `대장군'(종3품)과 `중랑장(中郞將 : 정5품)'의 중간 직위이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에 `1221년(고려 고종 8년) 4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선단(崔先旦)이 과거급제자 이양무(李陽茂) 등 86인을 선발했다'는 구절이 있다.

 

또, 활기리에는 목조대왕이 살던 집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무 장군 내외분의 묘소를 영경묘 ·준경묘라고 추존할 때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 舊居遺址碑)'를 세웠는데 고종황제 어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준경묘 ·영경묘 ·재실 ·목조대왕구거유지 등을 합쳐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받았다.

 

그런데 <씨족원류>에는 양무장군에게 여동생이 있어 유택(柳澤)에게 시집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근거를 아직 찾지 못했다.

 

양무공은 4남을 두었는데, 목조대왕 이외에 영필(英弼) ·영밀(英謐) ·영습(英襲) 3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영필 ·영밀은 자손이 없고, 영습공만 후사를 두어 선원선계 세번째 파계인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줄여서 주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주부공파에서는 목조대왕이 주부공의 아우라고 한다.

 

 

 

▣ 제1세 시조(始祖) 한(翰)

 

시조의 휘(諱)는 한(翰)이요, 호는 견성(甄城)이다. 신라의 사공(司空)벼슬을 지냈다.

배위(配位) 경주김씨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

 

공은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18세 때는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쳤다. 명성이 조정에까지 떨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지 1년 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온갖 벼슬아치들이 다 화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즐겼다. 그래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분이 바로 경주김씨 이다.<완산실록(完山實錄)에서>

 

 

 

제2세(世) 자연(自延)

 

시조 한(翰)공의 아들로서 이름은 자연(自延)인데 <경주이씨족보>에는 자연(子延)으로 표기되어 있다. 시중(侍中)을 지냈다. 배위는 진양군(晋陽君) 윤자인(尹自仁)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자연공이 신라 경순왕 때 시중을 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翰) 시조공이 신라 경덕왕(742∼764 在位) 때 살았는데, 경순왕(927∼935 在位) 때까지는 170여 년이나 간격이 생기니 30년이 1세대라는 통념으로 보아서는 너무나 떨어져 있다. 따라서 경순왕 때 살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자연공이 지냈다는 `시중(侍中)'이란 벼슬은 내각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그러나 배위인 윤씨의 아버지 윤자인의 봉군호(封君號)인 진양군(晋陽君)은 후대에 군호로 올려 기록한 것일 것이다.

 

 

 

제3세(世) 천상(天祥)

 

2세 자연공의 아들로 이름은 천상이요 벼슬은 복야(僕射)를 지냈다. 배위는 시랑(侍郞) 벼슬을 지낸 영일정씨 습명(襲明)의 딸이다. `복야'란 원래 중국의 당(唐) ·송(宋) 때 재상의 별칭인데, 고려 시대는 정2품으로 부총리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의 관직으로 지칭한 것이라 추측된다. 장인인 영일정씨의 관직 시랑(侍郞)은 신라 ·고려 때 관직으로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한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전한다.

천상공은 젊어서 매우 호탕하였는데, 늦게 이치를 궁구하는 일을 좋아해,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관서에 들어가 천문지리를 연구했다. 9년만에 천문지리에 달통하여서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지라, 고려로 돌아와서 완산부(完山府) 기린산(麒麟山) 왕자봉(王字峯) 밑에 산소 자리를 잡고서 “이곳에 산소를 쓰면 우리 후세 자손들 중에 반드시 왕이 나오리니 아무리 괴롭더라도 절대로 천장하지 말라”고 하였다.

 

 

 

제4세(世) 광희(光禧)

 

3세 천상공의 아들로 이름은 광희요 아간(阿干)을 지냈다. 배위는 대장군 황지선(黃志善)의 딸이다.

 

"아간"이란 벼슬은 "아척간(阿尺干)", `아찬'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17 등 관계의 제6위였다 한다. 광희(光禧)를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는 `광희(光喜)'로 쓰기도 한다.

 

태조고황제의 친구였던 이색(李穡 : 1328∼1396)이 지은 <환조대왕 정릉 신도비명(桓祖大王 定陵 神道碑銘)>에는 `전주리씨는 대성(大姓)으로 신라 아간 `광희'가 사도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고…'라고 하여 우리 시조를 `광희'로 보았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세직(世稷 : 世直)으로 시조를 삼아 중국 당나라 종실로 있다가 우리 나라로 건너와 전주에 세거하며 우리의 시조가 된 양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것이 세대로는 이 `광희'공에 해당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세직공은 훌륭한 인물로 문장과 도덕이 뛰어난 당대의 은둔 군자인데 아들 8명을 두었다. 공은 이 아들들에게 형제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며 참언과 재물을 멀리하라고 경계하였다. 그러나 아들 8형제 중에 한 명만이 대를 잇고 나머지는 전염병에 모두 죽는 대목이 곁들어져 있다.

 

 

 

제5세(世) 입전(立全)

 

4세 광희공의 아들로 이름은 입전이요, 벼슬은 사도(司徒)를 지냈다.

배위는 한림(翰林) 백광선(白光善)의 딸이다.

 

<씨족원류>에는 입전공의 벼슬이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요, 이 입전공부터 고려의 벼슬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사도'란 고려 때 삼공(三公 : 司馬 ·司徒 ·司空)의 하나로 정1품이었으며, 삼사(三師)와 더불어 임금의 고문이었다. 원래는 `삼중대광' 혹은 `벽상삼한(壁上三韓)'이란 품계가 있었는데 `사도'가 높은 벼슬이기 때문에 앞에 이런 품계명을 덧붙여 `삼중대광사도'라고 부른 듯하다.

 

`한림'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준말로 고려 때 한림원(翰林院)에 소속된 정4품의 관직이었다.

 

<동국세기>에는 입전공이 문옹(文雍)으로 표기되어 나오는데, 8형제 중 막내로서 위로 7형이 모두 전염병으로 일시에 사망하여 합동 장례를 치르고 유리걸식하니, 임금님이 그 소식을 듣고 고결함에 탄복하여 고관의 직책까지 주었다는 내용이 곁들어져 있다.

 

또 <충효전>에도 이 이야기와 대동소이하나 입전공이 문옹(文翁) 으로 기록되고 8형제 중 장형으로 되어 있다.

 

 

 

제6세(世) 긍휴(兢休)

 

5세 입전공의 아들로 이름은 긍휴요,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배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고려 시대의 `사공'은 삼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이었는데,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또 `정언'은 고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郞舍) 벼슬로 종6품이었다.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일을 맡았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일화가 곁들여 있다.

`긍휴공은 중국에 건너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천태수(醴川太守)가 되었다가, 7년 후에 우리 나라로 돌아와 몇 해 동안 계시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관사재(觀史齋)에 계시다가 객사하셨다.

 

이에 부인 이씨가 7세가 된 아들 염순(廉順)을 데리고 중국 조정에 밤낮으로 호곡하며 호소했다. 이 때 완탑촌(完塔村)에서 자는데 밤에 꿈 속에 육금불(六金佛)이 와서 하는 말이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밑에 버려져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의 힘으로 시체를 찾고, 또 천자의 명으로 우리 나라로 모셔와 선영에 장례 지냈다.'

 

그리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적혀 있다. 이 두 책에는 긍휴공이 도민(道敏)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긍휴공은 호탕하고 방랑벽이 있어 중국에 건너가 삼성문(三省門 : 三聖門)에서 수업(受業)하여 천문지리에 달통하고 9년(또는 8년)만에 귀국하여 시조의 묘를 향린산(香麟山 : 香因山)으로 이장하고 훗날을 기약한다고 했다 하였다.

 

 

 

제7세(世) 염순(廉順)

 

6세 긍휴공의 아들로 이름은 염순이며, 벼슬은 생원(生員), 호장(戶長)을 지냈다. 배위는 첨대정승(僉隊政丞) 정익조(鄭翼祚)의 딸이다.

 

`생원'은 옛날 소과(小科) 종장(終場)에서 경서(經書)의 뜻을 묻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호장'은 조선 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육방(六房) 중의 하나로 낮은 벼슬이었으나, 고려 시대에는 향리(鄕吏)의 으뜸 구실로 당대등(堂大等)이라고도 했는데, 요사이의 지방 자치 단체의 장쯤에 해당하였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다음과 같은 긴 이야기가 전한다. 이 두 책에서는 염순공이 철중(鐵中 : 哲重)으로 나온다.

 

`그는 7형제 중 맏형(또는 중간)이었는데, 나머지 6형제는 모두 농아였고, 혼자만 준수하고 문장에 능하여, 26세(또는 28세) 때 문명(文名)을 날려 중국으로 들어가 송나라 휘종(徽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귀국하니, 고려조에서 기특하게 여겨 예천태수(醴泉太守)에 임명했다.

 

그 뒤 그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천자의 눈에 들어, 마침 쳐들어온 금(金)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대도독부원수(大都督副元帥)로 임명되어 4만여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의 부인 오씨(吳氏)가 7세 된 아들 화선(和善 : 華先)을 업고 9개월을 걸어 중국에 들어가 완탑촌(玩榻村 : 完塔村)에서 묵을 때였다. 이 날 밤 꿈에 팔척대인(八尺大人 : 六丈鐵人)이 나타나 말하기를“당신 남편의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 <충효전>에는 蜀山으로 적혀 있음) 아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오씨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자살하려 하니 먼저 노인이 또 꿈에 나타나“죽지 말라. 훗날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여 깨닫고, 이튿날 문 밖을 나갔다.

 

그 때 한 여인이 슬피 울며 오는데, 거마(車馬)와 좌우에서 모시는 시녀들이 굉장하였다. 오씨가 나아가 물으니 답하되 “나는 운남국(雲南國 : 漢南國) 우도독(禹都督)의 딸인데, 남편 곽필성(쥦必誠 : 郭必成)이 도원수의 종사관(從事官)이었는데, 항주 대전에서 전사하여 그 시체를 찾으러 가는 길입니다” 하였다.

 

오씨도 그간의 일을 말하니, 그 우씨가 수레에서 내려 오씨의 손을 잡고,“나라는 비록 다르지만 인심은 같으니 어찌 차마 모른 체 하겠소?” 하고 함께 수레에 태워 항주로 갔다.

 

그러나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울부짖으며 낮에는 찾아 다니고 밤에는 복파장군(伏派將軍) 사당에서 잤다. 몇 개월이 되어도 찾지 못했는데, 하루는 한 노인이 지팡이를 들고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조선에서 온 부원수의 사령(使令)이었는데, 이 부원수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나는 다리에 살을 맞아 살아났으나 이렇게 불구가 되었습니다.”라고 하고 부원수의 시체를가리켜 주었다.

 

그래서 시체를 모셔 올 때 중국에서 모든 절차와 비용을 제공하여 3개월만에 귀국하여 선산에 장례지내니 조상꾼이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이 일화는 <완산실록>에서는 6세 긍휴공 사적에 비슷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 세 책이 거의 허구적인 사실을 기록한 소설적인 사료임을 짐작케 한다.

 

 

 

제8세(世) 승삭(承朔)

 

7세 염순공의 아들로 벼슬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생원 호장이었다. 배위는 시랑(侍郞) 백광현(白光賢)의 딸이다.

 

`시랑'은 고려 때 육부(六部) 또는 육조(六曹)의 버금 벼슬로 조선조 때 참판(參判) 곧 요사이의 차관에 해당된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승삭공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사람들이 동방의 효자라 칭했다. 나이 67세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향린산(香麟山)에 올라가 산맥을 보고 돌아오다가 청평산 (靑平山) 아래에 이르러 객사하였다. 왕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호상(護喪)케 하고, 시호를 문효(文孝)라고 내렸으며, 서원에다 모시게 했는데 고려 말에 이르러 없어졌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데, 승삭이 화선(和善 : 和先)으로, 60세에 등과하여 65세에 벼슬이 평의사(平義使 : 平義士)에까지 이르렀는데, 갑자기 작고하여 국왕이 예관을 파견하여 호상하고, 평장사(平章使 : 平章事)로 증직하고 시호를 문학(文學) 이라 하고, 향린산 아래에다 서원을 짓고 모셨는데, 공근왕(恭勤王 : <충효전>에는 恭讓王) 때 소인배들이참소하여 서원을 헐어 버렸다고 한다.

 

 

 

제9세(世) 충경(充慶)

 

8세 승삭공의 아들로 이름은 충경인데, <씨족원류>에는 광경(光慶) 혹은 극경(克慶)으로 적기도 한다고 했고, <목은집(牧隱集)>에도 충경(充慶)으로 씌어 있다 한다. 벼슬은 생원이다. 배위는 생원 윤자필(尹自必)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충경공은 초년에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유리걸식의 지경이었는데, 지관(地官) 김지원(金志元)이라는 이가 와서 “선대 조상의 산소가 흉지에 잘못 모셔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오.” 하므로, 그와 함께 향린산으로 올라가 산맥을 살펴보았는데, 김지원이 말하기를 “7∼8대에 이르러는 멸망하고 말 땅이니, 마땅히 천장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렇다면 마땅한 땅이 어디에 있소?” 하니, 대답하되 “청령산(靑嶺山) 밑에 5대에 걸쳐 서 삼공(三公)이 날 땅이 있소.”라고 했다. 그래서 그곳으로 산소를 옮기려고 하는데, 이 날 밤 부인 윤씨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선조의 유골을 무슨 까닭으로 천장하려 하는가? 청령산 아래 5대에 삼공이 나올 땅은 곧 금가(琴哥)의 산소 자리이니, 금가 집에 리 씨가 들어가 어찌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로 미루어 보면 도리어 멸망할 땅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윤씨가 꿈의 조짐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말렸으나 듣지 않고 김지원과 더불어 향린산 밑에 갔는데, 뇌성이 떨치더니 김지원은 벼락을 맞아 즉사하고, 충경공은 바위 밑에 엎어졌다가 겨우 살아 돌아오셨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똑같은 설화가 적혀 있는데, 다만 충경공의 이름을 희흥(希興 : 喜興)으로, 김지원(金志元)을 김지원(金知元 : 金智原)으로, 배위 윤씨는 할머니 오씨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제10세(世) 경영(景英)

 

9세 충경공의 아들로 이름은 경영이다. 벼슬은 생원 호장이었다. 배위는 유수(留守) 윤필인(尹必仁)의 딸이다.

 

`유수'는 수도 이외의 인근 도시 또는 행궁(行宮)에 두던 특수한 지방장관이다. 고려 ·조선조에 걸쳐 두었는데 중앙 관서의 직속 기관이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경영공이 7세에 부모가 함께 돌아가시니 증조모 정씨(鄭氏)가 등에 업고 구걸하면서 키워 16세가 되어 유수 윤필인의 딸에게 장가가셨다. 윤씨 부인은 증조모 정씨를 섬길 때, 증조모 정씨가 나이가 많고 치아 마저 없자 윤씨는 자신의 젖을 짜서 지성으로 효도하여 천수를 마치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효성스런 손부라고 칭찬했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똑같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이러하다. 경영공의 이름이 `직(直)' 또는 `진(進)'으로 표기되고, 증조모가 오씨로, 강남의 큰 장사꾼 최원(崔元 : 崔遠)에게 발탁되어 16세에 요명궁(寥明宮 : 瑤明宮) 거사(居士) 홍무(洪武 : <충 효전>에는 洪務日)의 사위가 되었다. 부인 홍씨의 효행이 특이하여 97세 된 증조모 오씨가 치아가 없음을알고 자신의 젖으로 봉양하여 101세까지 사시게 하고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르는데 죽만 먹고 그 애통함이 예도를 넘었었다는 점이다.

 

 

 

제11세(世) 충민(忠敏)

 

10세 경영공의 아들로 이름은 충민이고 벼슬은 장사(長史)이었다. 배위는 대장군 최오헌(崔五憲)의 딸이다.

 

`장사'라는 벼슬은 고려 때 동궁관(東宮官)의 관직으로 품계는 종7품이었으며, 또 육위(六衛)에 속한 종6품의 장사도 있었다. 조선조 때도 이런 관직이 있었는데,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에 속해 있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덧붙여 있다.

`충민공은 처음에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의탁할 데가 없었는데, 하루는 별안간 청의동자 (靑衣童子)가 나타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어 천명을 알지 못하고 대개가 하늘과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그대는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들을 허물하지 않으면서 천명을 기다리니 어째서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답하시되, “궁하고 통달함이 모두 운명에 달려 있는 데, 어찌 감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망령되이 말하리오?”라고 하였다. 이에 청의동자가 기꺼이 사례하고 한 물건을 주면서 “천명이 돌아올 때 이것이 변하여 활과 화살이 되어 교룡(蛟龍)을 쏘게 될 것이오”라 하고 가거늘, 이에 보니 토기 모양은 아니고 술잔 모양 같았다.

 

그것을 숨겨 두고 청림산(靑林山) 아래에서 그릇을 굽는데, 불합격품이 나오지 않아 집 안 형편이 차차 나아져 말년에는 부자 소리를 들었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약간 다른 점은 이러 하다. 곧 `충민'공의 이름이 `후경(厚慶)'으로 나오고, 그는 9형제였는데 일시에 8형제가 전염병으로 죽고, 막내인 그가 외톨이가 되어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데 천동(天童)이 내려와 이상한 물건을 주며 말했다는 것이다.

 

 

 

제12세(世) 화(華)

 

11세 충민공의 아들로 이름은 화인데 추밀(樞密) 벼슬을 지내셨다. 배위는 대언(代言) 벼슬을 한 황진(黃璡)의 딸이다.

 

'추밀'은 고려 때 왕명의 출납(出納) ·숙위(宿衛) ·군기(軍機) 등을 맡아 다스리는 관서 추밀원(樞密院)에 딸린 관원으로 추밀원사(樞密院使)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가리킨다. 종2품 ·정3품 벼슬이었다. 그리고 `대언'은 왕명을 출납하는 벼슬로 승선(承宣)이라 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승지(承旨)가 되었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화공은 처음에 집이 가난했으나 집안 일은 돌보지 아니하고 술집과 기생집에만 다니며 자칭 협객(俠客)이라고 했는데, 부인 황씨가 홀로 사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강도를 만났으나 끝까지 절개를 잘 지켰다. 청림태수(靑林太守)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포상하고 정려문을 내렸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비슷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다만 화(華) 공을 덕량(德亮) 또는 덕랑(德郞)으로 적고, 부인 황씨를 김씨로 대신했으며, 그 부인이 효성스럽고 용감하여 도적떼가 들어 재물을 강탈할 때 시어머니를 구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완산실록>의 내용을 부연하고 있다.

 

 

 

제13세(世) 진유(珍有)

 

12세 화공의 아들로 이름은 진유라 했는데 벼슬은 생원 호장을 지냈다. 그러나 <씨족원류>에는 일명 유진(有珍)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배위는 첨대중찬사(僉隊中贊事) 오대박(吳大朴)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기사가 더 들어 있다.

 

`진유공은 처음에 집안이 가난하였으되 지극한 효도로써 어머니를 받들더니, 부인 오씨가 시집와 아내의 도리를 극진히 하여, 가난하되 편안해하고 분수를 잘 지키며, 채소를 뜯어다 호구지책을 삼으면서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히 효도롭게 하니, 세상 사람들이 항상 효자 효부라고 칭하였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서는 진유공의 이름을 천균(千鈞) 또는 천준(天俊)으로 표기하고 어머니를 김씨로 표현한 외에는 대체로 <완산실록>과 같은 내용이다.

 

 

 

제14세(世) 궁진(宮進)

 

13세 진유공의 아들로 이름은 궁진인데 한림(翰林)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씨족원류>에는 호장을 지냈다고 하였다. 배위는 장군을 지낸 이요(李?)의 딸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더 들어 있다.

`궁진공이 15세에 아무개[失名]에게 나아가 배우는데, 그 선생이 낮에 꿈을 꾸었다. 꿈에 궁진공이 물고기를 잡아 양을 타고 올 때 달이 동산에서 뜨는데, 용이 머리를 북쪽으로 들고 꼬리를 낮게 하고 서고,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북 치고 구호 부르며 행진하는 꿈을 꾸었다.

 

그 선생이 그 꿈을 풀이해 보니 조월(早月 : 朝) 어양(魚羊 : 鮮)에 신령스러운 물체가 도와 응하는 격이라, 괴이히 여겨 감탄하다가 혼자 말하되, “별것 아닌 것 같으나 후일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으리라” 하고 스스로 물고기와 양 같은 물건을 준비해다가 두고 예로써 대접했다.

 

공의 나이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호류궁(琥琉宮) 교수관(敎授官)에 임명되었는데, 왕이 공의 모습을 보고 곧 한림원으로 옮겨 임명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남의 모함을 받아 귀양 갔다가 거기서 작고했다.'

 

그러나 <동국세기>와 <충효전>에서는 이 대목을 더 각색하여 미화시키고 있다.  곧, 궁진공의 이름은 여열(餘說)로 표기되어 나오는데, 여열이 15세 때 학문을 가르친 선생이 김대유(金大有)로 실명화(實名化)되고, 김대유가 꿈을 꾼 뒤 여열을 사위로 삼으며, 여열이 27세에 등과하여 홀유궁(笏留宮 : <충효전>에는 屹留宮으로 표기했음)의 교수관(敎授官)이 되니, 모든 선비들이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배륭대군(裴隆大君 : <충효전>에 는 濱龍大君으로 표기됨)이 여열의 기상과 문장을 보고 임금님께 추천하여 대제학(大提學)을 제수하려 했는데, 중상하는 자 있어 여열은 벼슬을 팽개치고 전원으로 돌아가 두문불출 하다가 작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은 두 아들을 두니 장남이 용부(勇夫)이고 차남이 단신(端信)이다. <씨족원류>에는 단신을 단인(端仁) ·서인(瑞仁)으로 기록되었는데 글자가 비슷하여 이런 표기가 생겼을 것 이다. 이 단신공이 문하시중(門下侍中) 벼슬을 지냈고 시중공파(侍中公派)의 시조가 되었다. `시중'은 요사이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제15세(世) 용부(勇夫)

 

14세 궁진공의 장남으로 이름은 용부요,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씨족원류>에는 대장군 겸 태자청도솔부솔(太子淸道率府率)을 지냈다고 하였다. 배위는 정승을 지낸 이형(李珩)의 딸이다.

 

`대장군'은 고려 무관의 벼슬로 상장군(上將軍) 다음, 장군(將軍)의 위로 종3품이었다. `태자청도솔부'는 태자좌청도솔부(太子左淸道率府)의 준말로 고려 때 동궁(東宮)의 시위(侍衛)를 맡은 관청이다. 그 관청의 장이 부수(府率)일 것이다.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덧붙여져 있다.

 `용부공은 3세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만 계신데, 남의 모함을 받아 세살배기가 잘못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 때 16세 된 누님이 한 분 계셨고 공은 겨우 말을 익히는 때였다.

 

마침 금(金)나라의 난리를 만나 중국 송나라 정부에서 군사를 모집하는데, 그 누님이 어린 동생을 대신하여 징발되어 낙랑(樂浪) 지방에 이르니 원수 이민항(李敏恒)이 군사를 점검하였다. 그 누님 이씨가 허리에 화살통을 비껴 차고 손에 화살을 들고 나서니, 그 자색이 남다르고 위풍이 당당하여 이민항 원수가 보고서 “그대는 뉘 집 아들인고?” 하므로, 대답 하되 “나는 한림(翰林) 리궁진(李宮進)의아들 용부(勇夫)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으로 데려갔다. 원수 악비(岳飛) 장군이 우리 나라 장수와 대좌하여 군사를 점검할 때, 누님 이씨가 앞으로 나가 섰다. 악비 장군이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말하기를 “뉘 집 아가씨 인데 군대에 들어왔느냐? ”하므로 이씨는 시를 지어 악비 장군에게 말하니 내용은 이러하다.

 

(點額難逃老父名) 이마에 점 찍히니 늙은 아버지 이름 빼낼 수 없어

(充軍何惜細腰躬) 군대에 채워지니 가는 허리의 몸이라고 어찌 애석해하리?

(羅衣換着鐵衣冷) 비단옷 벗고 차디 찬 철갑 옷을 갈아 입으니

(塞外幸伸男子風) 국경지방에서 다행히 남자의 기풍을 펼 것이로세.

 

악비 장군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칭찬하고 이 시로 인해서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간신의 이간질로 악비 장군이 죽었다. 그래서 남편과 사별한 이씨는 머리를 깎고 영고탑(寧古塔)까지 떠돌아가 아들을 낳고 살았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거의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만 `용부'가 `충일(忠逸 : 忠溢)'로, `이민항(李敏恒)이 이민행(李敏行)'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두 책에서는 일화가 더 구체적이다. 악비가 진회(秦檜)에게 모함을 당하여 죽을 때 리씨의 손을 잡고 뱃속의 아이가 남아일 것이니 잘 키우면 7대 후에 친정 본종(本宗)의 자손들과 손잡아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리씨는 머리를 깎고 일부러 장애자로 만들어 구걸하며 방성지(方城池) 면수(沔水) 가에 사는 왜인(倭人) 집에 의지하여 살았다.

 

그러나 <충효전>은 더 구체적이다.

 

리씨가 악비를 사별하고 스스로 병자로 만들어 유리걸식하다가 방령지(方靈地)에 이르러 면수정장(綿水亭長) 갈가(乫家)에 의탁하니 이는 이적(夷狄)이었다. 그곳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의 7대손에 이르러 퉁두란( 李之蘭 : 靑海李氏 始祖)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이 용부 대장군의 아들이 둘이 있으니 장남은 인(璘)이요, 차남은 거(?)로 이분이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를 이루어 시중공파에 이어 두번째 지파가 갈라져 나갔다.

 

<선원계보>에는 `인'과 `거' 두 형제만 기록되어 있으나, <씨족원류>에는 용부 대장군은 3남 1녀를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16세(世) 인(璘)

 

15세 용부공의 아들로 이름은 璘(인)이고 내시집주(內侍 執奏)란 벼슬을 지냈다.

배위는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시중(侍中)을 지낸 문극겸(文克謙 : 1122∼1189)의 딸이다.

 

평장사공의 휘는 거, 자는 만상(晩祥), 호는 정암(靖菴)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시조 사공공(司空公)의 16세손으로 1174년(고려 명종 4)에 대장군 용부(勇夫)의 차남으로 전주 자만동에서 태어나, 1194년(고려 명종 24)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가군사(永嘉郡事)에 제 수되었다. 1198년(고려 신종 1)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고 1200년 문하시중 평장사 (門下侍中 平章事)를 거쳐 고려 희종 때 재상으로서 왕의 스승을 겸했다. 강종 때 재상으로 서 세자의 사부(師傅)를겸했고 1214년(고려 고종 1) 재상으로 왕의 스승을 겸했다. 배위는 고려 의종때 시중(侍中)을 지낸 남평문씨 극겸(克謙)이 딸이다.

 

평장사공파(거)와 선원선계16세 인(璘)의 장인은 한 분?

 

 

 

제17세(世) 양무(陽茂) [생몰 : ?∼1231]

 

16세 인공의 아들로 이름은 양무이며, 벼슬은 장군(將軍)을 지냈다.

배위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전주에 살다가 아들인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삼척 이주(三陟移住) 때 삼척 활기리(活耆里) 로 옮겨 왔고, 그곳에서 1231년(고려 고종 18) 별세하여 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동(蘆洞) 신좌을향(辛坐乙向) 준경묘(濬慶墓)에 모셔져 있다.

 

배위 이씨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東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 영경묘(永慶墓)에 모셔져 있다.

 

1899년(광무 3) 4월 16일 고종황제가 준경묘 ·영경묘라고 묘소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양쪽에 묘비와 음기(陰記)를 고종황제가 친히 지었다. 그 내용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개국 초에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고 금관(金冠)과 옥대(玉帶)를 삼척 원에게 하사하고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해마다 두 묘소를 보살피게 했으나 점점 폐허화 되어 선조 때 정철(鄭澈 : 1536∼1593)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 산소의 지도까지 그려 올려 수축하기를 요청한 일이 있다.

 

그 뒤 다시 수축하고 대대로 산소의 수호와 벌목의 금지 등 보호에 애써 왔다. 그러다가 1899년에 고종황제가 재상 리중하(李重夏)를 파견하여 묘소를 재정화하고 구역을 확정하고 비를 세우고 내력을 음기로 새기게 하였다.

 

이로 보면 1899년부터 준경묘 ·영경묘라 추존되고 대대적으로 수축해 오늘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준경묘와 관련 다음과 같은 "백우금관(白牛金棺) 설화가 전해진다.

 

활기리에서 앞재를 넘어 준경묘에 이르면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신좌을향으로 양무장군의 묘가 모셔져 있는데,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 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세를 보면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므로 전주리씨 후손은 장손들이 허약하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160여 년 전에 양무장군께서 이곳에서 돌아가시자, 목조대왕께서는 선친의 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나무하러 두타산으로 올라갔던 집의 일꾼이 나무를 하다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도승과 상좌승이 앉아 산맥을 보며, “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도승의 말을 듣고, 나무하다 말고 뛰어 내려와 주인인 목조대왕에게 알렸다.

 

목조대왕은 급히 달려가 도승 일행을 만나 백방으로 간청하니, 그 도승이 그 자리를 가리켜 주는데, 대신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다. 곧 개토제(開土祭) 때 소 1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관은 금관을 써야 효험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에 편법을 쓰기로 하였다. 마침 처가에 흰소가 한 마리 있어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체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 형편이 못 되니 황금 빛깔의 밀짚(일설에는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에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우금관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신하여 1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했다고 도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도합 5백년의 조선왕조의 수명이 되었다고도 한다. 하여간 이 준경묘 자리는 오늘날도 풍수를 따지는 사람은 우리 나라 제일의 명당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장군'이란 벼슬은 고려시대에는 무관의 정4품 벼슬로 `대장군'(종3품)과 `중랑장(中郞將 : 정5품)'의 중간 직위이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에 `1221년(고려 고종 8년) 4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선단(崔先旦)이 과거급제자 이양무(李陽茂) 등 86인을 선발했다'는 구절이 있다.

 

또, 활기리에는 목조대왕이 살던 집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무 장군 내외분의 묘소를 영경묘 ·준경묘라고 추존할 때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 舊居遺址碑)'를 세웠는데 고종황제 어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준경묘 ·영경묘 ·재실 ·목조대왕구거유지 등을 합쳐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받았다.

 

그런데 <씨족원류>에는 양무장군에게 여동생이 있어 유택(柳澤)에게 시집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근거를 아직 찾지 못했다.

 

양무공은 4남을 두었는데, 목조대왕 이외에 영필(英弼) ·영밀(英謐) ·영습(英襲) 3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영필 ·영밀은 자손이 없고, 영습공만 후사를 두어 선원선계 세번째 파계인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줄여서 주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주부공파에서는 목조대왕이 주부공의 아우라고 한다.